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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보다 더 도시 같은 작은 도시의 풍경

by 반하다영원히 2025. 6. 16.

오늘은 도시보다 더 도시 같은 작은 도시의 풍경에 대해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도시보다 더 도시 같은 작은 도시의 풍경

1. 시간을 벽돌처럼 쌓아올린 거리


처음 이 작은 도시에 도착했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거리였다. 도로가 잘 닦여 있거나, 건물들이 화려하거나 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바닥의 보도블럭은 약간씩 기울어 있었고, 오래된 벽에는 담쟁이덩굴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어딘가에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질서와 안정감이 있었다. 마치 도시 전체가 누군가의 손길로 조금씩 다듬어진 듯, 무심한 듯 정성스럽게 놓인 풍경이었다.

 

서울처럼 빽빽하게 계획된 도시와는 다른 결이다. 이곳은 누군가의 삶이 물결처럼 겹겹이 쌓이며 만들어낸 거리였다. 어떤 상점은 30년 넘게 같은 자리에 있었고, 그 앞에는 주인 할머니의 자그마한 의자가 놓여 있었다. 또 다른 가게는 리모델링을 했지만 간판은 그대로여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듯 그 안에 남겨진 기억의 층이 보였다. 이 거리의 매력은 바로 거기 있었다. 빠르게 변화하는 대신, 조용히 축적되어 온 시간.

 

벽돌 하나, 나무 한 그루, 굽이진 골목의 모퉁이까지도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이 거리에는 ‘지금’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때’와 ‘이후’가 함께 겹쳐 있는 듯한, 이상한 시간의 중첩이 있다. 그래서 이 거리 위를 걷다 보면, 그저 길을 걷는 게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함께 느끼는 기분이 든다. 마치 기억 속 도시를 걷는 것처럼, 익숙하지 않지만 정겹고, 낯설지 않지만 매번 새로운.

 

이곳의 거리에는 광고판보다 사람이 많고, 자동차보다 자전거가 많으며, 스마트폰 대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다. 그것이 이 도시의 풍경을 특별하게 만든다. ‘작은 도시’라고 불리지만, 이 거리만큼은 어떤 대도시보다도 더 풍부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크기가 도시를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 삶이 곧 도시를 빚어낸다는 진실이 이 거리를 통해 선명하게 다가왔다.

 

2. 일상이라는 이름의 공연 무대


이 작은 도시에서 가장 즐겨 찾는 장소는 다름 아닌 중앙시장 근처의 작은 공터였다. 딱히 특별한 건 없다. 오래된 벤치와 음료수 자판기 하나, 그리고 계절 따라 바뀌는 화단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곳은 매일 다른 풍경을 선물해 주었다. 아침이면 장을 보러 온 어르신들의 바삐 움직이는 발걸음, 오후엔 자전거를 타고 놀다 쉬어가는 아이들, 저녁엔 담배 한 개비로 하루를 정리하는 청년의 뒷모습. 그 모든 것이 마치 연극처럼 시간대마다 다른 장면으로 펼쳐졌다.

 

이 작은 공터는 무대였고, 그 위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삶을 연기하지 않고 살아내고 있었다. 대도시의 거리에서 흔히 보이는 ‘치장된 존재들’이 아니라, 조금 구겨지고 낡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삶의 모습들이 여기 있었다. 어르신들의 낮은 목소리, 아이들의 웃음소리, 시장 상인의 호객 소리까지—이 모든 소리가 배경 음악처럼 겹치며, 어느 순간 나 역시 그 무대의 일부가 된다.

 

놀랍게도 이곳의 일상은 ‘반복’이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그 반복 안에 미세한 차이가 숨어 있다. 어제와 비슷하지만 다른 햇살, 같은 사람 같지만 오늘은 살짝 다른 표정. 서울의 일상은 늘 비슷하고 기계적이었지만, 이 작은 도시의 일상은 반복 속에서도 감정의 온도를 잃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에는 어떤 긴장감도 없다. 급히 지나치지 않고, 눈이 마주치면 짧은 인사라도 나누는 것이 이 도시의 방식이다.

 

작은 도시의 일상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다큐멘터리다. 연출되지 않고, 꾸며지지 않은 진짜 삶의 풍경. 도시는 결국 사람이고, 사람의 움직임이 도시를 만든다면, 이 작은 도시야말로 가장 ‘도시다운 도시’일지도 모른다. 인공의 화려함보다 일상의 따뜻함으로 구성된 무대. 나는 그 한가운데서 매일 작은 공연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관객이 되는 일이, 점점 내 삶에 중요한 의식이 되어가고 있었다.

 

3. 낡고 오래된 것들이 아름다운 이유


서울에서는 ‘새로운 것’이 늘 기준이 된다. 최신, 업그레이드, 리뉴얼, 오픈. 이 단어들이 도시의 시간을 이끌어간다. 그러나 이 작은 도시는 반대로 ‘오래된 것’에 가치를 둔다. 금이 간 벽, 낡은 목재 문틀, 지붕 위로 자란 풀조차 이곳에서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시간과 정서가 쌓여, 고유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도시가 낡은 것을 품지 않고 새것만을 좇을 때, 작은 도시는 과거와 현재가 함께 숨 쉬는 풍경을 지켜낸다.

 

어느 날,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에 들렀다. 책장엔 누렇게 바랜 책들이 많았고, 사장님은 손님이 없어도 책 먼지를 털고 있었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고요하고 따뜻했다. 서울이라면 벌써 폐업했을 그런 서점이 이곳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의 발길을 받는다. 누군가는 책을 사러 오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냥 들어와 조용히 앉아 책장을 넘긴다. 공간을 소비하지 않고, ‘머문다’는 개념이 가능하다는 것을 나는 그 서점에서 처음 배웠다.

 

여기서는 카페도, 시장도, 거리의 작은 벽 하나까지도 시간과 사람의 흔적을 담은 존재들이다. 낡았다는 이유로 쓸모를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이 묻어 있어 더 깊이 있는 풍경이 된다. 나는 그 풍경 안에서, 오래된 것들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지를 처음으로 느꼈다. 빠르게 지나가는 세상이 놓치고 가는 것들—그것들이 이 작은 도시에서는 여전히 제자리에 있다.

 

아름다움은 언제나 새로움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오래된 것, 낡은 것, 한 사람의 손길이 반복된 것 속에 더 짙게 남아 있다. 작은 도시는 그것을 보여준다. 정갈하지 않아도, 속도감이 없어도 괜찮다는 걸. 그리고 그런 풍경이야말로 우리가 진짜로 그리워하는 ‘도시’의 모습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