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마트 대신 시장, 빠름 대신 얼굴을 기억하는 관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이름 없는 관계의 편리함에서, 얼굴을 기억하는 느슨한 온기로
도시에 살 땐 내가 사는 동네에 어떤 가게들이 있었는지조차 잘 몰랐다.
퇴근길에 잠깐 들르던 무인 편의점, 언제나 셀프 계산대를 가진 프랜차이즈 마트, 정해진 진열 위치에 정해진 제품들이 늘 같은 포장으로 기다리고 있는 그곳들. 물건은 많았지만, 관계는 없었다. 어떤 상품이 세일 중인지, 어떤 신제품이 나왔는지에 대한 정보는 앱 알림이 먼저 알려줬고, 대면하지 않아도 되는 소비가 점점 익숙해졌다. 이름은 물론 얼굴도, 말 한마디조차 나누지 않는 관계 속에서 나는 ‘편리함’이라는 것을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작은 도시에서 처음 시장에 들어섰을 때 느낀 그 낯선 감각은 지금도 선명하다. 복잡하게 얽힌 가게들, 계산대도 없이 손으로 건네고 손으로 받는 거래, 어깨에 걸린 장바구니와 좁은 골목 사이로 오가는 인사들. "아가씨, 이거 오늘 막 들어온 거야." "비 오기 전에 사가, 오늘 장 보려고들 일찍 나왔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말을 걸고, 나는 그 말에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대답이라는 게 거창한 게 아니라, 그저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게 웃거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 도시에서는 드물었던 그 소소한 교류들이 이상하리만치 따뜻하게 다가왔다.
시장에서는 물건만 사는 게 아니라, 사람과 짧게나마 얽힌다. 한두 번 얼굴을 비추면 “또 오셨네요”라는 말이 따라오고, 몇 번을 더 가면 그 사람은 내 장바구니를 기억한다. "上品하니 이거 좋아하셨죠?"라는 말이 건네질 때, 나는 마치 나의 작은 취향까지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진 듯한 감정을 느낀다. 소비가 아니라 관계가 오가는 이곳에서의 장보기는 하나의 ‘의례’ 같았다. 단순한 식료품 구매가 아니라, 그날의 정서와 리듬을 조율하는, 느슨하지만 분명한 사회적 연결의 실타래였다. 편리함과 바꿀 수 없는, 얼굴을 기억하는 관계의 위안. 나는 그 안에서 처음으로 ‘사는 것’과 ‘살아가는 것’의 차이를 배웠다.
2. 빠르게 고르는 대신, 느리게 고르는 신뢰의 과정
도시의 대형마트는 목적형이다. 목표물처럼 장바구니에 넣고, 계산하고, 나오는 구조다. 대부분의 시간은 비교와 선택, 할인 여부의 확인에 쓰인다. ‘무엇이 더 저렴한가’, ‘어디가 1+1인가’, ‘후기가 좋은 건 뭘까’와 같은 정보가 구매를 결정짓는다. 얼굴 없는 상품과의 만남은 기능과 가격으로만 소통한다. 하지만 시장은 그렇지 않다. 물건을 들었다 놓기를 여러 번, 한 바퀴 돌고도 다시 첫 가게로 돌아오게 되는 이유는, 단순히 품질 때문만은 아니다. 어쩌면 그 물건을 파는 사람의 눈빛, 말투,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신뢰가 물건 선택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나는 시장에서 천천히 걷는 법을 배웠다. 먼저 눈으로 살핀다. 제철 과일이 쌓여 있는 방향, 비린내가 적은 생선 가게, 직접 썰어 파는 고기 앞에서 멈칫하고, 손에 쥐어주는 시식 한 점에 마음이 기운다. "이건 내가 먹어봤어. 좋아." 그렇게 건네는 말 한마디에, 나는 그 물건을 고른다. 브랜드나 포장, 원산지를 따지기 전에, 그 사람의 표정과 톤, 진심이 먼저 다가온다. 구매는 정보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로 바뀐다. 그리고 신뢰는 시간이 필요하다. 빠르게 살 수 없기에, 시장에서는 오히려 천천히, 깊게 관계를 쌓는다.
하루는 내가 간 생선 가게에서 아저씨가 멸치를 한 줌 더 얹어 주며 말했다. "이건 그냥 주는 거야. 지난번에 고등어 맛있게 드셨다면서?" 그 말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시장에서는 이런 ‘작은 보답’이 일상이 된다. 숫자가 아닌 기억으로 이어지는 구매, 거래를 넘어선 마음의 교환이 있다. 도시에서 익숙했던 ‘합리성’은 잠시 사라지고, 정서가 그 자리를 채운다. 나는 이 느린 교환 속에서 처음으로, 물건을 사는 행위가 곧 삶의 일부이자 관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3. 소비의 공간이 아닌 삶의 무대로서의 시장
시장에 자주 가다 보면, 장보기가 점점 쇼핑이 아니라 일상의 중요한 루틴처럼 자리잡는다. 단지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날의 기분을 전환하고, 작은 만남과 대화를 통해 감정을 조율하는 일종의 의식. “오늘도 잘 지냈어?”라는 말이 반찬가게 사장님의 인사말이 되고, “내일은 덜 추울 거래”라는 날씨 이야기가 채소가게 앞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그 말들은 짧지만, 그 안에 담긴 삶의 결이 너무나 선명하다. 시장은 누구에게도 화려하지 않지만, 누구에게도 멀지 않다. 나이 많은 이에게는 일상의 유일한 소통 창구이고, 젊은 이에게는 ‘삶다운 삶’을 체험할 수 있는 따뜻한 공간이다.
무엇보다 시장은 혼자 있는 시간을 덜 외롭게 만들어준다. 대형마트나 편의점에서의 고립감과는 다르게, 시장은 ‘내가 누군가에게 보이고 있다’는 기분을 준다. 익명성 대신 익숙함이 있는 공간, 고객이 아니라 이웃으로 받아들여지는 관계, 그런 곳에서는 사람의 존재가 조금 더 뚜렷해진다. 나의 작은 선택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생계와 웃음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느낄 때, 소비는 곧 책임이 된다. 그 책임은 억지로 짊어진 짐이 아니라, 나도 이 공동체의 일부라는 안도감으로 돌아온다.
시장에는 삶의 리듬이 있다. 아침에 문을 열고, 점심 전 바쁜 시간대를 지나, 해가 지면 천천히 문을 닫는다. 그 리듬 안에서 하루하루가 쌓이고,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장날이 되면 더 많은 이들이 모여들고, 누군가는 그날만 기다려 반찬거리를 사고, 누군가는 얼굴을 보기 위해 굳이 장을 보는 척하며 나온다. 나는 그 흐름 속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감각을 배웠다. 사람과 사람이, 얼굴과 얼굴이, 인사와 인사가 엮여 만든 느슨하지만 진한 연결망. 그것이 바로 시장이 주는 가장 큰 치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