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매일 걷는 길이 주는 위안 - '동네 산책’이라는 치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매일 같은 길, 매일 다른 풍경
처음엔 그저 운동 삼아 걸었다. 도시에서 내려온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였다. 낯선 동네, 낯선 풍경, 낯선 사람들 속에서 나는 ‘몸을 움직이면 마음이 덜 어지러울 것’이라는 생각으로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지도 앱을 켜고, 몇 분을 걸었는지, 몇 칼로리를 소모했는지를 확인하곤 했다. 익숙한 도시의 습관이 나도 모르게 따라붙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 바퀴, 두 바퀴, 그렇게 매일 같은 길을 걷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수치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목적 없는 걷기는 점차 나를 진정시키는 리듬이 되었고, 그 리듬 속에서 나는 이전에 미처 보지 못한 풍경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같은 골목을 지나도 매일 풍경은 달랐다. 어제는 닫혀 있던 가게 문이 오늘은 열려 있었고, 한 할머니는 마당에서 꽃을 심고 있었으며, 누군가는 길모퉁이에 빨랫줄을 걸고 있었다. 바람이 조금 다르게 불고, 냄새도 미묘하게 달라졌다. 갓 구운 빵 냄새, 흙 내음, 어떤 날은 비 냄새도 났다. 내가 걸어가는 길 위에 놓인 이 작은 변화들은, 매일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그 자체로 큰 위안이 되었다.
도시에서는 하루가 늘 똑같이 흘렀다. 회사, 지하철, 회의, 야근. 장소는 바뀌지만 삶의 패턴은 복사한 듯 반복됐다. 하지만 이 작은 도시의 골목은 그 똑같음을 살짝 비틀며 나를 새로운 감각으로 이끌었다. 무엇보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 없는 시간이 흘렀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와는 무관하게 이 길은 나를 받아주었다. 그 무심한 환대는 치유였다. 매일 같은 길을 걷는다는 것은 단조로움이 아니라, 삶의 작은 흔들림들을 지켜보는 일이며,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를 확인하는 의식 같았다.
2. 혼잣말의 시간 – 걷는 동안 마음은 말을 한다
산책은 몸의 움직임이지만, 그 속에 담긴 것은 마음의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음악을 들으며 걷기도 했다. 도시에서는 길을 걸을 때 늘 무언가를 듣거나, 보거나, 통화하거나, 심지어 이메일을 확인하곤 했다. 걷는 동안조차도 ‘무언가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하지만 작은 도시에서의 걷기는 그런 역할을 요구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듣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그저 발 아래 땅의 감각을 느끼고 바람의 결을 따라가는 산책이 내게 찾아왔다. 그렇게 걷다 보면 내 안에서 생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말들이, 마음속에서 소리 없이 떠오른다. “왜 그때 그런 선택을 했을까?”, “지금 이대로도 괜찮은 걸까?”, “조금 더 기다려도 될까?” 이런 물음들은 서울의 시끄러운 거리에서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조용하고도 평화로운 골목길에서는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조용히 내 곁을 걷는다. 처음엔 그 질문들이 무거웠고, 답이 없다는 사실에 막막했지만, 걷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답을 구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마음속에 머물기만 해도 위로가 되는 질문들이 있었다.
특히 저녁 무렵, 해가 지기 직전에 걷는 길에는 묘한 서늘함과 따뜻함이 동시에 존재했다. 그것은 하루가 저물고 있다는 실감, 그리고 하루를 무사히 살아냈다는 안도감에서 비롯되었다. 그 시간의 색은 조금 붉고, 그림자는 길어졌다. 나는 그 속에서 작은 혼잣말을 했다. 고맙다고, 오늘 하루 잘 견뎠다고, 내일도 걸어보자고. 산책은 그렇게 내 안의 대화를 이끌어냈고, 그 대화는 어느 위로보다 깊고 오래 남았다.
3. 발이 기억하는 거리, 마음이 기대는 일상
어느 날부터 걷는 길은 낯설지 않게 되었다. 발이 먼저 움직이고, 몸이 따라갔다. 신기하게도 어디에서 돌아서야 하는지, 어느 담벼락에서 고양이가 나타나는지, 어떤 시간에 어느 가게가 불을 켜는지 알게 되었다. 처음엔 그저 지루하고 작아 보였던 동네가 어느새 익숙하고 다정한 풍경으로 변해 있었다. 익숙함은 지루함이 아니라, 나를 받아주는 안정감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 익숙한 거리에서 나는 매일 조금씩 회복되었다.
특히 산책의 끝자락, 집에 거의 다다랐을 때 느껴지는 감정은 특별했다. 이 길 끝에 내가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 돌아갈 수 있는 장소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큰 위안을 준다. 길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었다. 내가 매일 걸었던 이 길은 나의 감정, 기억, 생각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고, 그 축적이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몸이 먼저 기억하는 길, 눈을 감고도 떠오르는 거리, 거기에는 나라는 사람이 서서히 안착하고 있었다.
산책은 어떤 거창한 운동이 아니다. 하지만 매일 반복되는 이 작고 단순한 행위가 나를 얼마나 지탱하고 있었는지를 나는 이제 알게 되었다. 마음이 무너지는 날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 날도, 비가 오는 날도, 그저 길 위에 나를 올려두기만 하면 어느 정도의 회복은 찾아왔다. 그것은 마치 자연이 보내는 무언의 손짓 같았다. “괜찮아. 오늘도 네가 걸었다는 것이 중요해.”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다시 하루를 살아갈 용기를 얻곤 했다.
결국 이 산책은 치유였다. 바람, 햇살, 돌담, 가게, 나무, 풀, 고양이, 그리고 발걸음. 이 모든 것들이 모여 나를 다독이는 세상의 방식이 되었다. 걷는다는 건 공간을 지나는 일이 아니라, 시간을 통과하고 감정을 정리하며 나를 돌보는 행위였다. 그렇게 매일 걸었던 그 길은, 어느새 내가 가장 사랑하게 된 장소가 되었다. 그 길 위에서 나는 다시 나를 만나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