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소음, 여긴 없었다 – 조용함이 삶에 미치는 영향
도시의 소음은 너무 오래 우리 곁에 머물렀습니다.
우린 그 소리를 ‘배경’이라 부르며 무심히 살아왔고,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을 때에야 비로소
그것이 우리 삶을 얼마나 두껍게 짓누르고 있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한 달 동안 작은 도시에서 머무는 동안,
나는 ‘조용함’이라는 공기가
사람을 얼마나 달라지게 하는지 매일 체험하게 되었어요.
1. 소음이 사라진 공간, 마음이 들리기 시작한 순간
서울에서 나는 항상 무언가에 둘러싸여 살았다. 자동차 경적, 배달 오토바이, 공사장 굉음, 지하철 안내 방송, 그리고 스마트폰 알림음까지. 소음은 배경이 아니라 거의 내 삶의 중심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 소리들에 적응해버려서, 고요함은 오히려 불안의 신호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조용한 공간에 들어가면 괜히 긴장이 되었고, TV나 음악을 켜 두지 않으면 마음이 어지러웠다. 그건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내 감정과 생각이 소음에 덮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은 도시에서의 첫날, 무엇보다 먼저 나를 당황하게 만든 건 ‘정적’이었다. 귀가 아플 만큼 조용한 밤, 침대에 누운 나는 마음속에서 울리는 수많은 생각들에 갑자기 둘러싸였다. 평소라면 TV를 틀고 잤을 테지만, 그날만큼은 조용히 침묵과 함께 누워 있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곧 알았다. 조용함은 나를 외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직면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평소엔 듣지 못하던 내 안의 작은 목소리들이 조심스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괜찮니?”, “지금 이대로 만족하니?”, “무엇을 놓치고 있니?”
도시는 늘 외부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회사의 기준, 사회의 기대, 타인의 시선 같은 것들이 소음처럼 내 삶을 지배했다. 하지만 이 조용한 공간에서는 내 목소리만이 울렸다. 처음엔 그 소리가 너무 낯설고 두려웠지만, 시간이 지나자 하나씩 이해하게 되었다. 내 불안의 근원, 내 욕망의 형태, 내 기쁨의 색깔을. 소음이 사라지자 비로소 나는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회복의 시작이었다.
2. 조용함이 가르쳐준 리듬 – 천천히, 그리고 깊게
서울의 일상은 늘 ‘빨리’라는 주문으로 시작되고 끝났다. 빠른 템포의 출근길, 짧은 점심시간, 촘촘히 짜인 일정들. 심지어 대화마저도 빠르게 주고받아야 ‘센스 있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 속도는 마치 내가 존재하는 이유를 입증하듯, 쉴 틈 없이 증명해내야 하는 어떤 무대와도 같았다. 그렇게 속도에 길들여진 몸은 조용함 앞에서 잠시 멈췄고, 나는 놀랍게도 처음으로 ‘지금’이라는 시간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조용한 공간은 자연스럽게 속도를 늦추게 한다. 급히 밥을 먹을 이유가 없고, 말이 줄어드니 생각이 많아졌다. 사람들과의 대화는 길지 않지만 따뜻했고, 누구의 말도 끊지 않으려는 그 ‘여유’는 묘하게도 나를 안심시켰다. 그렇게 조용함은 새로운 리듬을 내게 가르쳐주었다. 도시의 빠른 박자에서 벗어나, 마치 클래식 음악처럼 천천히, 하지만 깊고 묵직하게 하루가 흘러갔다.
그 리듬 속에서 나는 나만의 호흡을 찾게 되었다. 걷는 속도조차 느려졌고, 카페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창밖을 바라보며 멍하게 있는 시간이 죄스럽지 않게 느껴졌고, 그 시간이 내 정신을 정화시키는 걸 몸으로 느꼈다. 무엇보다, 깊은 생각이 가능해졌다. 더는 얕고 산만한 정보들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의 감정이나 생각에 천천히 머물 수 있게 된 것이다. 조용함은 단순히 소리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마음이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자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집중은 나를 다시 사람답게 만들어주었다.
3. 삶이 낮은 소리로 말할 때 – 고요함이 품은 친밀함
서울에서의 삶은 늘 크게 말해야 했다. 내 존재를 알리기 위해 목소리를 키워야 했고, 주변의 소음에 묻히지 않기 위해 더 강하게, 더 분명하게 드러내야 했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우리는 어느 순간, 삶의 미세한 목소리를 놓치게 되었다. 사랑의 표현도, 슬픔의 탄식도, 기쁨의 숨결도. 너무 작아서, 너무 조용해서, 도시의 소음 속에서는 들리지 않는 것들.
작은 도시에 와서야 나는 그 ‘낮은 소리들’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창문을 열었을 때 들어오는 새소리,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의 움직임, 밤에 들리는 개 짖는 소리, 그리고 그 안에서 더 작게 들려오는 내 숨소리. 이 조용한 환경은 마치 삶이 천천히,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걸어오는 것 같았다. “잘 지내고 있니?” 하고.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그 속삭임에 대답할 수 있었다. “응, 이제 조금씩 괜찮아지고 있어.”
고요함은 인간 사이의 거리도 다르게 만든다. 말이 줄어든 공간에서는 시선과 몸짓, 미묘한 감정의 떨림이 더 크게 다가온다. 시장의 할머니가 주는 덤 한 조각, 식당 주인의 “또 오세요”라는 말에 담긴 따뜻함, 지나가는 사람이 건네는 짧은 인사. 그런 조용한 친절이 내 마음에 오래 머물렀다. 이 작은 도시의 조용함은 사람 사이에 진짜 ‘온기’를 전달하는 통로가 되어주었다.
서울에서는 늘 증명하고 설명해야만 했던 감정들이 여기선 조용히,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삶이 낮은 소리로 말하기 시작하자, 나도 더는 소리를 키우지 않아도 되었다. 조용함은 결국 내가 세상과, 그리고 나 자신과 친밀해질 수 있는 가장 순한 방식이었다. 그 조용한 나날 속에서, 나는 비로소 깊은 숨을 쉬며 살아있음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