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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 첫날, 낯선 고요에 적응하는 법

by 반하다영원히 2025. 6. 2.

도착 첫날, 낯선 고요에 적응하는 법

작은도시,낯선고요

 

1. 너무 조용해서 이상한, 그 침묵 속으로 들어가기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 작은 도시는 나를 아무 말 없이 맞았다. 환영도, 거부도 없는 풍경. 말 그대로 ‘고요’였다.

대도시에서의 삶에 찌든 나는 처음 그 고요를 마주했을 때, 되려 두려웠다. 자동차 소리, 지하철의 진동, 누구의 통화 소리조차 없는 거리. 가끔 고양이 한 마리가 지나가고, 멀리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의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고요하다는 것은 본래 위로가 되어야 할 텐데, 그 고요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이 너무 크게 느껴졌다. 숨소리, 발소리, 머릿속 생각들이 마치 확성기를 단 것처럼 울려 퍼졌다.

서울에서는 늘 무언가에 눌려 있었다. 소리, 사람, 일정, 그리고 비교. 그 속에서는 나의 생각조차 소음에 묻혀 들리지 않았고, 그게 오히려 편했다. 그런데 여기는 아니었다. 도착하자마자, 나는 너무 많은 나를 마주해야 했다. 익숙한 방식으로 스마트폰을 들고, 음악을 틀고,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그 고요를 막아보려 했지만, 작고 조용한 도시는 그 어떤 소리도 오래 머물게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잠잠했다. 그리고 나는 그 속에서 숨이 막히는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

첫날 밤, 숙소 창문을 열고 어둠을 바라봤다. 도시의 불빛 대신 보이는 건 정적이 내려앉은 마을과 별이 떠 있는 하늘. "왜 이렇게 조용하지?"라는 질문을 반복하다가, "사실은, 서울이 너무 시끄러웠던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는 우리를 바쁘게 하고, 정신없이 만들고, 끊임없이 달리게 하지만 그건 어쩌면 침묵을 두려워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무 소리 없는 상태에서 진짜 내 목소리를 듣게 될까 봐. 작은 도시는 그 진실을 단박에 들이밀었다. 그 침묵 속으로, 나는 그렇게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갔다.

 

2. 시간의 틈을 견디는 일


도착 후 가장 당혹스러웠던 건, 하루가 너무 길다는 사실이었다. 도시에서는 시간이라는 것이 항상 부족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서둘러야 했고, 하루의 절반이 지나기도 전에 할 일에 치여 숨이 막혔다. 그런데 여기는 달랐다. 시간은 마치 누군가 늘여놓기라도 한 듯 길게 느껴졌고, 초침이 유난히 천천히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른 채, 나는 커튼을 걷고 햇살이 방 안을 물들게 하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커피를 내리고, 조용히 식탁에 앉아 마시고, 다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것. 그저 시간을 견디는 일이 하루의 중심이 되었다.

도시에서는 시간이 늘 쫓아오는 존재였다면, 여기서는 내가 시간을 따라잡아야 했다. 처음에는 그 느린 리듬이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이대로 괜찮을까?"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도시적 본능이 머릿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 초조함을 견디다 보니, 이상하게도 여유라는 것이 스며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나를 불안하게 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나를 안아주는 순간이 되었다. 그 틈 사이로 어릴 적 기억이 떠오르고, 잊고 있던 꿈이 생각났다. 시간이 지나면 지나칠수록, 내가 나로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시간의 틈은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결국은 정직한 거울이었다. 내가 얼마나 오래 스스로를 외면해왔는지, 어떤 것들로 마음을 채워왔는지 돌아보게 했다. 그건 마치 예전에는 너무 빠르게 흘러가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둘씩 떠오르는 과정이었다. 도시의 시간은 기능적이지만, 이곳의 시간은 감정적이다. 그래서 더 불편하고, 그래서 더 깊이 스며든다. 나는 그 시간을 견디며, 조금씩 나를 회복하고 있었다.

 

3. 관계 없는 하루, 그 자유와 고독


작은 도시에 처음 도착한 날, 누구 하나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당연히 그랬다. 여기는 내가 속했던 곳이 아니었고, 나는 그저 지나가는 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 익명성은 도시에서의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서울에서의 익명성은 군중 속에서의 무관심이지만, 이곳에서는 존재 자체를 조용히 인정하는 방식 같았다. 지나가는 사람과 마주치면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시장에서는 물건을 팔기 전에 날 한 번 훑어보며 묻는다. “여행 오셨어요?”

처음에는 그 거리감이 낯설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하루, 아무와도 관계를 맺지 않는 하루는 생각보다 서글펐다. 말할 상대가 없다는 건 고독을 부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고독은 도시에서의 그것과는 달랐다. 도시의 고독이 고립이라면, 이곳의 고독은 고요한 동행에 가까웠다. 나는 그날, 혼자 밥을 먹고, 혼자 길을 걸었고, 혼자 책을 읽었다. 처음엔 외로웠지만, 이내 그런 하루가 선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관계가 없다는 건, 관계에 휘둘리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자유는 때로 그렇게 쓸쓸한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도착 첫날 밤, 어두운 방 안에서 창밖을 오래 바라봤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고, 어디에도 가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 비어 있는 하루가 이상하게도 나를 가볍게 만들었다. 하루를 온전히 나 자신에게 쓸 수 있다는 건, 도시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나는 그 자유 속에서 조금씩 나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외롭지만 충만했고, 조용하지만 의미가 있었다. 작은 도시의 첫날은 그렇게 끝났다. 조용하고, 낯설고, 깊었다. 그리고 나는 그 낯선 고요 속에서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