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많이 가지는 게 자유'라는 환상에서 벗어난 여행기에 소개하려고 합니다.
1. 풍요라는 이름의 속박
한때 나는 '많이 가진다는 것'이 곧 자유라고 믿었다.
여행을 갈 때마다 더 많은 짐, 더 다양한 옵션, 더 비싼 숙소와 편리한 이동 수단을 선택하는 것이 나를 더 자유롭고 여유 있게 만들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여행 가방은 항상 가득 찼다. 예비용 옷과 신발, 계절에 맞지 않는 아이템까지 챙기며 혹시 모를 모든 상황에 대비하려 애썼다. 백업 배터리 두 개, 충전기 세 종류, 크고 무거운 카메라 장비, 한 번쯤 입을까 말까 한 원피스들. 그것들이 내 여행의 '자유'를 보장해줄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여행은 갈수록 더 피곤해졌고, 내 몸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비행기에서 내릴 때마다 나는 가장 먼저 나오는 캐리어를 기다리며 불안한 시선을 던졌고,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마다 휠이 틀어지는 짐을 붙잡느라 진땀을 뺐다. 골목길을 걸을 땐 좁은 인도를 따라 낑낑대며 이동했고, 그 무거운 짐을 방에 던져놓고 나서야 비로소 ‘여행이 시작됐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자유를 느끼기 위해 자유를 잃고 있었던 셈이었다.
‘많이 가지는 게 자유’라는 생각은, 어쩌면 우리가 소비 사회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 신념일지도 모른다. 필요한 것 이상을 가지는 것이 나를 안전하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 그러나 정작 그 짐들이 나를 얽매고 있었다. 내 발을 무겁게 만들고, 내 시선을 좁히며, 내가 마주하는 세상을 간접화시켰다. 풍요라는 이름의 속박. 그것이 바로 내가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했던 굴레였다. 그리고 그 굴레는 내가 스스로 만든 것이었다.
2. 비워야 보이는 것들
변화는 아주 작은 계기로부터 시작되었다. 어느 날, 한 외국 여행자와 마주 앉아 식사를 하던 중, 그의 여행 가방이 내 백팩보다도 작다는 걸 보고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그는 반년째 유럽과 아시아를 여행하고 있었고, 그 작은 가방 하나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정말 부족하지 않아요?”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부족한 건 물건이 아니라, 내가 물건에 기대는 마음이었어요.”
그 한마디가 깊이 박혔다. 그 이후로 나는 조금씩 짐을 줄여보기로 했다. 처음엔 불안했다. 이걸 안 챙기면 어떡하지? 저걸 안 가져가면 불편하지 않을까? 하지만 놀랍게도, 물건이 줄어들수록 내 여행은 더 풍성해졌다. 하루하루를 준비하는 시간은 짧아졌고, 무거운 짐이 없으니 도시의 길거리를 훨씬 오래 걷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전에는 보지 못했던 표정들, 풍경들, 소리들을 더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오히려 너무 많았던 것이 나를 무디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비우는 여행은 단지 짐을 줄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 자신의 기준을 다시 세우는 과정이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왔는가?’라는 질문 앞에 선 순간, 나는 장식처럼 가져온 물건들보다는 지금 내 앞에 놓인 거리의 소음, 따뜻한 햇살, 낯선 사람의 미소에 더 마음을 열 수 있게 되었다. 짐이 적어지니 선택이 간결해졌고, 불확실함을 받아들이는 용기도 조금씩 생겨났다. 그리고 그때서야 나는 진짜 자유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다.
자유란, 모든 가능성을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것만을 품고 그 외의 것들을 놓아줄 줄 아는 용기였다. 내가 무언가를 소유할수록, 그것은 나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관계를 되돌리는 순간, 나는 오히려 세상을 더 깊게, 더 가볍게 누릴 수 있게 되었다.
3. 덜어낸 만큼 풍성해진 여정
나는 이제 여행을 떠날 때, 무엇을 챙기느냐보다 무엇을 놓고 가느냐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체크리스트는 간결해졌고, 가방은 작아졌다. 그 안에 담긴 물건들은 단순하지만 실용적이고, 내게 진짜로 필요한 것들이다. 그 덕분에 나는 한층 더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고, 여행의 매 순간을 더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제는 '준비된 여행자'가 아니라, '열려 있는 여행자'로 나 자신을 정의한다.
예전에는 내가 직접 준비한 것만이 안전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 예기치 못한 상황도, 그것이야말로 여행의 일부라는 것을 안다. 백팩 하나만 메고 떠난 어느 도시에서, 나는 우연히 한 마을 축제에 참여하게 되었고, 거기서 만난 사람들과 새벽까지 웃고 떠들었다. 아무 계획에도 없던 하루였지만, 그날은 내 여행에서 가장 깊이 남는 기억이 되었다. 어쩌면 준비된 것보다 더 풍성한 것은, 준비되지 않은 여백 속에서 피어나는 순간들인지도 모른다.
내가 비워낸 건 단지 짐이 아니었다. ‘언제나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 ‘남보다 앞서 있어야 한다’는 조급함, ‘더 많이 소유해야 행복하다’는 환상. 그런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자, 내가 마주한 세상은 더 다채롭고 부드러워졌다. 비워낸 만큼, 나는 더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었고, 그 이야기는 물건으로는 절대 채울 수 없는 값진 자산이 되었다.
이제 나는 ‘많이 가지는 게 자유’라는 오래된 환상으로부터 벗어났다. 그 믿음은 결코 나를 자유롭게 하지 못했고, 오히려 나를 짐으로 짓눌렀다. 반대로, 덜어내고 비우고 내려놓는 그 순간부터 나는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진짜 자유는 소유의 양이 아니라, 선택의 명료함에 있다. 나는 그 명료함 속에서, 처음으로 진짜 나를 만났다. 그리고 그 만남은, 어떤 풍경보다 더 눈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