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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멀 여행을 해본 후, 다시는 캐리어를 끌지 않기로 했다

by 반하다영원히 2025. 5. 28.

미니멀 여행을 해본 후, 다시는 캐리어를 끌지 않기로 했다

캐리어

 

1. 캐리어의 무게, 여행의 무게


나는 오랫동안 여행하면 캐리어가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다. 여행은 짐이 많아야 편하다고,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다고 믿으며 24인치, 때로는 28인치 캐리어를 끌며 공항을 누볐다. 휠이 덜컹거리는 소리, 계단을 오르내릴 때의 곤욕, 좁은 숙소에 들어섰을 때 짐 둘 곳조차 마땅치 않은 순간들. 그러나 그 모든 불편함조차 “여행의 일부”라며 애써 위안해왔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책에서 ‘짐을 줄이면 자유로움이 늘어난다’는 문장을 읽었다. 그것은 단순한 수사처럼 보였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에 걸렸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미니멀 여행이었다. 이번만큼은 백팩 하나로 떠나보자고, 단 한 번만이라도 ‘짐이 없는’ 여행을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그 결심은 생각보다 나를 많이 흔들었다. 짐을 줄이기 위해 나는 내가 평소 ‘당연하게’ 챙겼던 것들과 대면해야 했다. 여분의 옷, 쓸모 모를 전자기기, 그저 불안함을 덜기 위해 챙겼던 물건들. 그것들은 여행의 필수가 아니라, 나의 불안이 만들어낸 위장이었다.

백팩 하나를 등에 메고 공항을 걸을 때, 나는 놀라운 가벼움을 느꼈다. 내 손은 자유로웠고, 몸은 민첩해졌으며, 마음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가지지 않음’이 이렇게도 가볍고 명료한 감각을 줄 줄은 몰랐다. 숙소에 도착해서도, 도시를 이동할 때에도, 나는 짐에 발목 잡히지 않았다. 캐리어의 무게를 내려놓자, 나는 마침내 진짜 ‘여행자’가 되었다. 길 위에서의 모든 순간이 자유로웠고, 어떤 방향으로든 발걸음을 돌릴 수 있었다.

그 경험 이후, 나는 확신했다. 다시는 캐리어를 끌지 않겠다고. 그것은 단지 물리적인 선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여행의 방식, 나아가 삶의 방식에 대한 깊은 전환이었다. 짐이 적을수록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다는 아이러니. 나는 그 역설 속에서 진짜 나를 만났다.

 

2. 불필요함을 들여다보는 일


미니멀 여행이 알려준 것은 단순히 짐을 줄이는 노하우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선택과 습관, 더 깊게는 불안을 들여다보는 여정이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물건을 하나하나 들고 ‘이게 정말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대답은 대부분 ‘아니오’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쉽게 버릴 수 없었다. 마치 어떤 감정들이 그 물건에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았다. 불안, 집착, 과거의 기억. 캐리어는 단순한 짐가방이 아니라, 내 감정의 보따리였다.

그동안 나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다는 이유로 너무 많은 것을 챙겼다. 그런데 그 ‘혹시’는 대부분 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불필요한 것들이 공간을 차지하고, 내 움직임을 제한하고, 내 시야를 좁혔다. 미니멀 여행을 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진짜 필요와 욕망을 구분하게 되었다. 진짜 필요는 늘 단순하고 명료하다. 반면 욕망은 끝이 없고 복잡하다. 내가 들고 다녔던 그 무거운 캐리어는 사실, 나의 끝없는 욕망이 만들어낸 상징이었다.

불필요함을 내려놓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과정을 거치고 나니, 놀라운 평화가 찾아왔다. 선택지가 줄어드니 결정이 빨라졌고, 가벼운 짐만큼 내 마음도 가벼워졌다. 물건이 줄어드니 풍경이 더 또렷이 보였고, 사람들의 표정과 도시의 온도도 더 잘 느껴졌다. 무언가를 비워내야만 들어올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걸, 나는 그제야 알게 되었다.

지금도 나는 여행을 떠날 때마다 짐을 싸는 그 순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건 단지 가방을 꾸리는 시간이 아니라, 내 삶을 들여다보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내려놓고, 무엇을 데리고 갈 것인가. 그 질문은 여행뿐 아니라, 매일의 삶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짐을 싸는 법을, 더 나아가 짐을 덜어내는 삶의 기술을 배운 듯하다.

 

3. 가벼운 여행, 가벼운 삶


캐리어를 포기한 이후의 여행은, 물리적으로는 단순해졌지만 감각적으로는 훨씬 더 풍요로워졌다. 몸이 가벼워지자 마음이 더 멀리까지 닿을 수 있었고, 복잡한 짐 대신 단 하나의 풍경에 집중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작은 백팩 안에 들어 있는 몇 가지 필수품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내 삶에 큰 전환점을 안겨주었다.

이제는 여행을 준비하는 내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다. 더 이상 ‘혹시’를 준비하지 않고, 오히려 ‘그때 가서 해결하자’는 태도를 갖게 되었다. 이는 단순히 낙관적인 자세를 넘어서, 나 자신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변화였다. 어떤 상황이 닥쳐도 나는 그 순간의 선택으로 잘 헤쳐나갈 수 있다는 자각. 그것이야말로 미니멀 여행이 선물해준 가장 큰 수확이었다.

그리고 이 변화는 일상 속에도 스며들었다. 옷장은 한결 단출해졌고, 책상 위는 필요 이상의 물건이 사라졌다. 집 안의 공기가 달라진 듯했다. 물건이 줄자 시간도 줄었다. 더 이상 정리에 허비하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니 돈에 대한 스트레스도 줄었다. 마치 여행을 가볍게 하면 할수록 더 멀리 갈 수 있듯, 삶도 가벼워질수록 더 깊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여전히 여행을 사랑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예전엔 많은 것을 보려 했고, 많은 것을 소유하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적은 것 속에서 깊은 것을 보려 한다. 미니멀 여행은 단지 새로운 방식의 이동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존재였다. 그리고 나는 그 존재의 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다시는 캐리어를 끌지 않기로 한 결심은, 내가 어떻게 세상을 마주할지를 바꾼 선언이었다.